글로벌 에너지 운송 경쟁, 200억 달러 이상 VLCC 투자 촉발
미-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글로벌 에너지 기업과 선주사들이 액화천연가스(LNG) 인프라와 초대형 유조선(VLCC)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에너지 운송 및 저장에 대한 물리적 통제권을 쥐려는 전략적 베팅이 급증하는 것이다. 올해에만 200척이 넘는 VLCC가 발주됐는데, 이는 200억 달러를 훌쩍 넘는 지난 25년 내 최대 규모다. 지정학적 갈등이 에너지 공급망의 목줄을 얼마나 세게 쥘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올해 현재까지 발주된 VLCC는 총 217척으로, 2025년 한 해 발주량(93척)의 두 배를 이미 넘어섰다. 이처럼 폭발적인 투자는 유조선 시장에 지정학적 리스크 프리미엄이 깊게 반영됐음을 의미한다. 전 세계 석유·LNG 물동량의 5분의 1이 지나던 호르무즈 해협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아시아와 유럽 정유사들은 대서양 분지에서 원유를 끌어와야 하는 처지가 됐다. 덕분에 미국산 원유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브라질, 가이아나 등 남미산 원유 수출도 급증했다. 운송 거리가 길어지자 VLCC 일일 용선료는 전쟁 전인 2월 13만 2천 달러 수준에서 50만 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노후 선박 교체 수요와 제재 유조선을 운항하는 ‘그림자 선단(shadow fleet)’의 존재 역시 시장의 과열을 부채질하고 있다.
에너지 운송 경로의 지각변동은 기업들의 공급망 전략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비용 효율성을 극대화하던 ‘적시 생산(Just-In-Time)’ 모델은 폐기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만약의 사태 대비(Just-In-Case)’ 전략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물리적 자산을 직접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진 것이다. LNG 인프라 시장 역시 2026년 1,189억 달러에서 2033년 2,453억 달러 규모로 연평균 11%의 고성장이 예견된다. 세계 최대 LNG 수출국이자 천연가스 생산국인 미국으로 수십억 달러의 인프라 투자가 몰리는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 이제 기업의 경쟁력은 공급망의 견고함과 저장 시설 접근성, 잠재적 병목 지점의 통제력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시장의 경쟁 구도를 재편하고 있다. 선제적으로 VLCC를 발주하고 LNG 터미널과 운송선을 확보한 기업은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행사할 기회를 잡았다. 반면 투자에 뒤처진 기업들은 불안정한 공급망과 천정부지로 솟은 운송 비용의 이중고에 시달리며 경쟁에서 도태될 위기에 처했다. 신조선 가격이 척당 1억 3천만~1억 4천5백만 달러에 달하고, 10년 된 중고 선박 가격이 신조선가를 넘어서는 기현상까지 벌어지면서 신규 진입 장벽은 한층 높아졌다. 에너지 트레이더들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과 공급망 취약성이 최소 2027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투자자라면 에너지 운송·저장 분야의 자본 지출 동향, 신규 선박 발주량, 그리고 에너지 생산자와 물류 기업 간 전략적 제휴를 날카롭게 주시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가 곧 국가 안보인 시대에 물리적 자산 통제는 비용 효율성을 넘어선 생존 전략이 됐다. 중장기적으로 이 같은 투자의 향방이 에너지 가격 안정성과 공급 신뢰도를 결정할 것이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뉴노멀’이 된 지금, 탄력적인 공급망 구축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기업 생존의 핵심 조건이다.
참고문헌
